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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검사, 정치인 되기가 그렇게 어렵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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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무적 감각 빈곤이 빚은 시행착오

민원 접수자로서의 화법으로 시종

여전히 벗어나지 못한 사정치의 늪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21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파인그라스에서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와 면담하고 있다. 맨 왼쪽은 정진석 대통령 비서실장 ⓒ 대통령실

윤석열 대통령은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2013년 10월 국회 국정감사)라는 국회 답변으로 유명해졌다. 여주지청장으로 국정원 댓글 사건 특별수사팀의 팀장을 맡고 있을 때였다. ‘강골 검사’ ‘국민 검사’의 호칭이 그를 따라다니게 된 연유다. 그 신조를 올곧게 지킨 덕분에 그는 대통령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그는 대통령 당선 제1성으로 “오직 국민만 보고 가겠다”라고 다짐했다. 국민도 그 말을 믿었다. 사람에 충성하지 않았던 검사가 대통령이 되었으니 국가와 국민 말고 누구에게 충성할 것이냐는 신뢰였다. ‘끼리끼리 정치’로 국민의 신망을 잃었던 문재인 정권과의 차별화라는 점에서도 ‘국민만 보고 가는’ 지도력은 국민에게 큰 희망이고 위안일 수 있었다.

윤 대통령은 당선 직후부터 의욕적으로 개혁을 추진했다. 먼저 청와대 이전을 밀어붙였다. 구중궁궐에서 떠나 국민 곁으로 가겠다는 공약의 실천이었다. 취임하면서 매일 출근길 문답을 실시했다. 언론과 적극적으로 소통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그런데 대통령실 이전은 야당의 요란스러운 트집 잡기로 빛이 흐려졌고, 도어스테핑은 한 출입 기자의 고성으로 인해 6개월 만에 중단되고 말았다.

정무적 감각 빈곤이 빚은 시행착오

이런 소동은 검사 대통령의 정무적 감각 빈곤이 초래한 엇박자 혹은 시행착오의 예라고 할 수 있다. 대통령실 이전의 경우 좀 더 진지하게 연구·검토한 후 계획을 잘 세워 추진했더라면 아마도 국민의 적극적인 호응을 얻었을 것이다. 도어스테핑 또한 점진적으로 횟수를 늘려가면서 서로가 그 의의와 예의를 익혀갔더라면 기자가 대통령에게 소리를 질러 따지고, 대통령이 이날로 문답을 중단해 버리는 사태에까지 이를 일이 아니었다.

윤 대통령은 취임 다음 달 미국 국빈 방문 때 국빈 만찬에서 ‘아메리칸 파이(American Pie)’를 열창하고 상·하원 합동회의에서 유창한 영어로 연설함으로써 미국인들은 물론 우리 국민으로부터도 박수를 받았다. 여유와 자신감에 보내진 박수였다. 그렇게 감성적일 수 있었던 윤 대통령이 갈수록 국민 정서를 읽어내는 능력의 퇴화를 드러냈다. 권력자로서의 아집이 커진 탓이라고 짐작할 수밖에 없다.

대통령이 되기 전에는 선하고 다정한 이웃 아저씨 이미지로 다가오던 사람이 취임 몇 개월 지나지 않아 나르시시스트가 되고 마는 것은 일반적 현상이다. 윤 대통령도 ‘대통령들의 독선’이라는 덫에 발목 잡힌 인상을 갈수록 더 뚜렷이 드러냈다. 역대 어느 대통령에게도 뒤지지 않을 만큼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보이긴 했으나 진지하게 소통하고 참을성 있게 이해를 구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국민은 자상하고 참을성 있는 의논과 설득을 원한다. 그 과정을 건너뛰면 민심은 등을 돌리고 만다. 민주주의가 어렵다고 하는 게 그 때문이다. 반면에 바로 그런 과정이 전제됨으로써 민주주의는 안전한 제도일 수가 있다.

윤 대통령이 지난 21일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와의 회동에서 보여준 장면들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의도적 인색’이었다. 그는 여당의 대표와 만나면서 대통령 비서실장을 배석시켰다. 독대하기엔 격이 안 맞는다는 인식의 표출이었을까? 식사 시간을 일부러 피한다는 의도를 공공연히 상대방에게 인식시켰다. 좌석 배치에서는 지위의 차이를 뚜렷이 드러내고자 애쓴 흔적이 역력했다. 장방형 탁자를 가운데 두고 대통령이 한쪽에, 한 대표와 정진석 비서실장이 맞은편에 앉았다. 원탁에 둘러앉았던 민주당 이 대표와의 회담과는 너무 다른 구도였다. 서열을 분명히 하자는 뜻이었을 것이다.

민원 접수자로서의 화법으로 시종

윤 대통령은 두 팔을 벌려 탁자를 짚은 자세였다. “그래, 할 이야기가 있으면 어디 해봐”라는 압박이거나 “내게 기껏 그런 얘기나 하자고 만나자 한 거야”라는 질책과 어울리는 자세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정 실장과 홍철호 정무수석을 임명할 때 언론들은 대통령실의 정무 기능을 강화하기 위한 인사라고 해설했다. 그런데 이들이 들어간 이후 대통령실의 정무 기능은 아예 없어진 느낌이다(더불어민주당이 이재명 방탄을 위해 정치를 파괴하고 있는 게 현실이긴 하지만). 이날 정 실장은 한 대표가 나가서 딴소리 하지 않도록 하는 쐐기였다.

대통령실 인적 쇄신과 관련, 윤 대통령은 “구체적으로 누가 어떤 시기에 어떤 문제를 야기했는지 근거를 대면 필요한 조치를 취하겠다”라고 했다. “증거를 내놓고 이야기해야지”라는 검사의 화법이다. 그날 한 대표는 빨간 커버의 파일까지 갖고 가서 김 여사 라인 8명의 정리를 촉구했던 모양인데 대통령은 ‘구체적 증거’를 요구하는 식으로 대응했다. 대통령의 인사는 정치적 필요에 의해서도 한다. 오히려 그런 경우가 더 많다. 그러나 윤 대통령은 정무적 판단을 멀찍이 밀어 버렸다.

부인 김건희 여사의 대외활동 중단 요구에 대해 “이미 줄였고, 더 자제할 것”이라고 대답했다. 김 여사가 연루된 여러 의혹과 관련해서는 “문제가 있으면 수사받고 조치를 취하면 되는 것”이라고 밝혔다. 한 대표의 ‘3대 요구안’ 전반을 두고는 “무엇을 바꿔야 하는지 이야기해주면 필요한 조치를 할 것”이라며 “비서실장과 정무수석에게 자세한 내용을 보내달라”고 했다. 윤 대통령에게 한 대표는 의논 상대가 아니라 깨우쳐 줘야 할 민원인이었다. 할 말이 있으면 구체적 증거를 비서실장과 정무수석에게(대통령 자신에게 말고) 보내라는 민원 접수자의 화법이었을 뿐이다.

윤 대통령은 이야기가 끝나갈 무렵에 “당정이 하나가 되어 정부를 성공시키는 것이 당을 성공시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윤 대통령은 또 “오늘의 위기는 정치적 위기, 정치 상황의 위기다. 과감하게 이야기할 것이 있으면 정무수석에게 하고, 당정 간 소통을 강화해나가자”라고 말한 것으로 언론들이 보도했다.

‘당정이 하나 된다’라는 것을 당의 일방적인 협조나 복종이라고 여기는 빛이다. ‘정치 상황의 위기’라고 인식하면서도 문제에 대해 정치적으로 대응하기보다는 옳고 그름을 따지고 증거 우선을 강조하는 검사 식의 해결방식을 제시했다. 그렇게 풀릴 문제였으면 지금처럼 악화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민주당 이 대표와 민주당 의원들의 사법적 저항에서 보듯이 증거가 아무리 많아도 정치화된 문제를 사법적 판단으로 풀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이 점을 왜 생각지 않는 걸까? 여당 대표가 할 말이 있으면 정무수석을 통해서 하라는 것은 또 무슨 뜻일까?

여전히 벗어나지 못한 사정치의 늪

야당의 ‘김건희 특검법’ 발의와 관련, “만약 우리 의원들의 생각이 바뀌어서 ‘야당 입장처럼 가겠다’라고 하면 나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 아니냐”고 한 말은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여당 의원들이 단합할 수 있는 명분을 줄 생각은 없으니 알아서 하라는 뜻이나 다를 바 없다. “나에게 등을 돌려봐야 망하는 것은 한 대표와 국민의힘 뿐”이라는 것일까?

윤 대통령이 이날 한 대표를 홀대해서 보낸 후 추경호 국민의힘 원내대표를 불러 만찬을 했다는 기사에는 숨이 막힌다. 한 대표 불신임의 공공연한 표출이다. 당을 향해 한 대표 축출을 주문한 것일 수도 있다. 불과 수년 전에 우파 정권이 무너지는 것을, 소용돌이의 중심에서 목격했던 윤 대통령이 자기 부인을 위해 여당을 내홍(內訌)에 빠뜨릴 수 있는 메시지를 주고 있는 것은 충격적이다. 한 대표를 외톨이로 만들 수는 있다. 그러나 결과는 공멸이다. 박근혜 정부가 넘겨준 거울을 왜 보지 못할까?

정권은 윤 대통령 것만이 아니다. 대통령직이 패밀리 비즈니스(동아일보 ‘김순덕 칼럼’의 표현을 빌리자면)일 수도 없다. 윤 정권을 성립시킨 사람들은 표를 준 자유 우파 유권자들이다. 눈앞에서 촛불집회의 위세에 눌려 우파 정권이 맥없이 무너지는 것을 목격한 자유 우파 국민들의 한이 서린 표가 윤 정권을 만들었다. 그러므로 검사 적 정의감과 승부 의식으로 정치판을 뒤흔들려고 해서는 안 된다.

천하제일검(검사)이라는 칭호를 얻었던 국민의힘 한 대표가 오히려 정치의 요체(민심에 순응하는 것)를 꿰뚫어 보고 나름대로 힘겹게 활로를 찾고 있는 모습은 애처롭기까지 하다. 윤 대통령이 왜 “필요하다면 나를 밟고서라도 나아가라”라고 말해주지 않을까? “굳이 한동훈일 까닭은 없다”라고 말하고 싶겠지만 그 또한 소중한 당의 인적 자산이다.

대통령의 바람직한 리더십은 군림하고 명령하며 위의(威儀: 위엄 있고 엄숙한 태도나 차림새)를 뽐내는 데 있지 않다. 뜻 있는 인재들을 정치에 참여시키고 그들에게 각자의 재주와 기량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게 동기를 부여하는 것이야말로 대통령 리더십의 진정한 멋이다. 여당을 디바이드 앤 룰(divide and rule: 분할 통치) 방식으로 조련하겠다는 것은 대통령이 가장 피해야 할, 경박한 용인술(用人術)이다.

여전히 사정치(私政治)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정치 현실이 답답하고 또 답답하다.

ⓒ

글/ 이진곤 언론인·전 국민일보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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