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공지능(AI)에 대해선 번역 작업의 효율성을 높인다는 진단과 인간 일자리를 대체할 것이라는 경고가 공존한다. 번역 노동자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더 적은 대가로 더 높은 강도의 작업을 요구받는 구조로 바뀌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AI 시대에 인간 번역의 가치는 무엇일까.
노승영 번역가는 지난 17일 국회도서관 국제전략정보센터에서 ‘인공지능 시대의 번역: 언어의 경계 넘어 의미를 읽다’를 주제로 열린 전문가 간담회를 통해 “인공지능 기계번역은 단기적으로 지속가능하지 않다. 인간의 개입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21년차 번역가인 그는 「번역가 모모 씨의 일일」(공저)를 썼고, 2024년 수지 시히의 「세상 모든 것의 물질」로 한국출판문화상 번역상을 받았다. 이번 간담회는 국회 직원들을 대상으로 열렸다.
AI 시대 통번역 업계는 일자리에 큰 영향을 받을 분야로 꼽힌다. 번역 AI 도구가 상용화되면서 일의 능률은 늘고, 같은 작업도 짧은 시간에 할 수 있게 됐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인공지능 활용: 생성형 인공지능의 직업 적용 가능성 측정’ 보고서는 자사 AI 챗봇 ‘코파일럿’ 사용자 데이터를 분석해 AI 적용 가능성이 가장 높은 직업으로 통번역가를 꼽았다.
“번역 프로그램 개발 참여… 내가 내 발 밑 허무는 일을 했구나”
노 번역가는 AI 번역에 대한 인간의 태도를 세 가지로 분류했다. 산업혁명 당시 러다이트 운동처럼 AI 도입을 노동 현장에서 거부하는 부류, AI를 적극 받아들여 활용하는 부류, 그리고 인간이 AI의 수단이 되지 않고 주체적으로 활용하는 부류다.
노 번역가는 스스로를 첫 번째 부류, 즉 노동 현장에서 AI 도입과 사용을 거부하는 부류에 가깝다고 설명했다. 그는 “산업혁명 이후 공업 기계가 생산의 주류가 됐지만 여전히 수공예가 남아 있다”며 “소수의 독자를 위한 인간 번역이 남아 있을 것이라 보고, 인간 번역을 하겠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어 “일본어 번역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작업에 제가 참여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내 발 밑을 허무는 일을 했구나’ 생각도 한다”고 덧붙였다.
AI 시대에 번역 노동의 모습은 이미 크게 달라지고 있다. 번역 노동시장에서는 기계번역을 거친 뒤 ‘전문 검수와 문화적 조율’을 인간에게 맡기는 ‘MTPE(Machine Translation Post-Editing·기계번역 후편집)’ 방식이 빠르게 확산하고 있다. 노 번역가는 한 유력 미국 외신인 W사가 국내에서 번역가를 구하면서 기사를 직접 번역할 사람이 아니라 기계번역 결과물을 한국 상황에 맞게 수정할 사람을 찾은 사례를 들었다.
“인간이 AI 속도에 자신을 맞추고, 기계의 수단이 돼”
그렇다면 AI가 번역 노동을 더 수월하게 만들었을까. 노 번역가는 오히려 그 반대라고 답했다. 같은 시간 동안, 혹은 같은 금액에 수행해야 하는 업무의 난도와 강도가 높아졌다.
“(번역가가) 이전에 받던 돈을 받으려면 더 많은 시간을 일해야 하게 됐다. 예컨대 예전의 번역 작업은 쉬운 문장도, 어려운 문장도 있어서 난이도가 달라 어떤 때는 편하게, 어떤 때는 어렵게 일했다. 그런데 기계 번역을 거친 결과물의 편집·검수만을 맡는 것은 매우 집중을 요하는 일이다. 번역가로선 같은 시간에 끊임 없이 신경을 곤두세우고,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노 번역가는 이를 두고 “인간이 AI 속도에 자신을 맞추고, 인간의 기계의 수단이 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인간이 AI 수단이 되는 방식으로 번역 노동이 바뀌는 경우, AI 번역의 함정도 커진다는 것이 그의 지적이다. 노 번역가는 AI 번역의 한계로 ‘평균 이상의 번역’을 하기 어렵다는 점과 신조어 등 끊임없이 변화하는 언어에 대응하기 어렵다는 점을 꼽았다. 기계번역은 평균을 지향하는 반면 인간은 탁월함을 지향한다는 것이다. 그는 동료 번역가들이 이미 한국어로 번역된 기존 작업물을 옆에 두고 작업하는 사례를 들었다. 기존 번역을 답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와 다르게 번역하기 위해서라는 설명이다.
AI 의존도 높아지고 번역 수준이 낮아지는 순간이 오면?
특히 AI 활용이 널리 퍼져 인간 노동을 대체하는 경우, 이른바 ‘정보의 열화(劣化)’가 발생한다고 경고했다. 노 번역가는 이를 자신의 꼬리를 먹는 뱀인 ‘우로보로스의 함정’에 빗댔다. 당초 AI의 번역 기능은 인간이 만들어낸 고품질의 번역 말뭉치를 학습하며 그 질이 높아졌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시중에 기계번역물의 비중이 높아지면 AI가 이를 다시 학습하고, 이것이 반복되면 결과물의 정보 가치도 떨어진다는 것이다. 결국 AI 번역의 높은 성능 역시 인간 번역가가 만들어낸 수준 높은 번역물이 지속적으로 공급되는 조건에서 가능하다는 지적이다.
번역을 ‘암호의 해독’이 아니라 ‘의도의 복원’으로 본다면 AI가 번역 노동을 대체할 수 없는 지점이 보다 뚜렷해진다. 번역이 단순이 언어 바꾸기가 아니라 저자의 의도를 발견하는 노동에 가깝다는 해석이다. 노 번역가는 “가령 ‘Love is happiness’라는 문장을 번역하려 할 때, 이를 한국어 문장을 영어로 번역한 결과라 생각하면 결과가 달라진다”며 “영어는 명사로 관계를 표현하는 언어이고, 한국어의 경우 연결어미로 표현한다. 만약 이 문장이 한국어에서 번역된 문장이라고 생각해보면 저는 ‘사랑하면 행복하다’고 표현했을 것이다. 아직 AI는 이처럼 번역하지 못할 거라 믿고 싶다”고 말했다.
노 번역가는 인간이 기계의 수단이 되는 것을 막으려면 업무 조직 차원에서 AI 활용 방식을 통제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저 부서는 직원 3명만 데리고 잘 하는데, 여기는 왜 이렇게 많냐’며 경쟁시켜 인력을 줄이고 기계 비중을 늘릴 것 같은 걱정이 든다. 그러면 AI 의존도가 높아지고, 번역 수준이 낮아졌을 때 다시 돌이키기가 굉장히 힘들 것”이라고 했다.
이어 “‘기계번역 맡겼으니 이거 좀 고쳐서 가져와’라고 한다면 사람은 기계의 수단이 된다. 반면, ‘AI를 쓰든 어떻게 하든 문서를 책임 지고 번역하라’고 주문한다면, 번역가는 기계를 주체적으로 이용해 결과물을 가져올 것”이라며 “경쟁과 효율을 추구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로부터 보다 자유로운 국회도서관과 같은 기관들이 모범을 보일 수 있지 않을까”라고 제언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