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이란의 휴전 제안을 물리치고 해상 봉쇄와 제재가 이란을 더 조일 때까지 기다리는 쪽을 택했다. 앞서 이란은 미국이 항구 봉쇄를 풀고 원유 제재를 면제하고 동결 자산 120억달러(약 16조3000억원)를 돌려주면 7일 안에 호르무즈 해협을 열겠다고 했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은 이란이 진정성 없이 무리한 대가를 선제적으로 요구했다는 이유를 들어 휴전안을 거부했다.
전문가들은 강력한 경제 제재로 벼랑 끝에 몰린 이란을 조금 더 압박하면 향후 백기 투항에 가까운 완벽한 양보를 받아낼 수 있다는 트럼프 대통령 특유 계산이 깔려 있다고 평가했다. 11월 3일 미국 중간 선거를 앞두고 유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겠다는 정치적 의도도 크게 작용한 것으로 풀이된다.

트럼프 대통령은 27일(현지시각) 정치 전문 매체 악시오스 인터뷰에서 “이란은 합의를 원하지만, 내가 원하는 합의는 그런 게 아니다”라며 “1년 전이었다면 우리가 합의했을지 모를 조건으로, 그들이 무리수를 뒀다(overplayed)”고 했다. 전날 백악관을 떠나며 이란 측 제안을 거부했다고 언급한 트럼프 대통령은 이란이 “크게 지고 있어 해협을 당장 열고 싶어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이번 주 이란과 협상이 다시 열릴 것으로 내다봤다. 군사 공습을 재개할 가능성을 묻는 질문에는 “늘 생각하고 있다”고 답했다. 미국은 이르면 28일 카타르 중재로 스티브 위트코프 중동 특사가 압바스 아라그치 이란 외무장관을 따로 만날 예정이다.
이란은 아라그치 장관이 22일 뉴욕 유엔총회 현장에서 위트코프·재러드 쿠슈너 특사에게 휴전 제안을 했다. 알자지라에 따르면 이란은 미국을 향해 자국 항구 해상 봉쇄 해제, 원유 판매 제재 유예, 동결 자산 120억 달러 반환을 요구했다. 동시에 레바논과 예멘을 포함한 광범위한 중동 지역 휴전도 조건으로 달았다. 이란은 이 조건이 충족되면 호르무즈 해협을 열고 최종 합의를 향한 협상을 시작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트럼프 행정부는 이란이 신뢰할 수 없는 태도로 과도한 선결 조건을 요구했다며 이 제안을 받아 들이지 않았다. 마이크 왈츠 유엔 주재 미국대사는 27일 CNN에 “이란은 대화를 하겠다는 약속만 한 채 모든 것을 선불로 요구했다”며 “트럼프 대통령은 이란이 선의를 가지고 핵 프로그램 종식 협상에 제대로 임할 것이라고 확신하지 못했다”고 했다. 악시오스에 따르면 이란은 협상 의제를 호르무즈 해협과 해상 봉쇄로 좁히려 하는 반면, 트럼프 행정부는 이란에 핵 양보부터 요구하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는 현재 미국이 가동 중인 전방위 경제 제재가 이란 숨통을 확실히 조이고 있다고 확신했다. 스콧 베선트 재무장관은 같은 날 폭스뉴스에 “이란산 원유 최대 구매국인 중국이 이란 지원을 대폭 줄였다”며 “중국에 마지막 원유를 넘기고 나면 아마 2주 안으로 이란 손아귀에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현재 미국의 호르무즈 해협 재봉쇄로 이란 원유 수출길이 좁아지면서 이란산 원유 수출은 사실상 막혔다. 대신 미군 지원 아래 해협을 빠져나가는 원유는 늘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악시오스에 “이번 주말 개전 이후 가장 많은 원유가 해협을 지났다”고 했다. 미 국방 당국자는 “25일 밤 중에만 2200만배럴이 해협을 통해 수출됐다”고 했다. 이는 한국이 8일에 걸쳐 들여오는 원유와 맞먹는 물량이다.
미 정부 당국자는 CNN에 “미국이 호르무즈 해협을 장악하고 있어 협상을 서두를 이유가 없다”고 했다. 리처드 와이츠 나토 국방대학 선임 비상주 연구원은 27일 알자지라에 “백악관이 조금 기다리면 더 나은 조건을 얻을 수 있다”고 판단했을 수 있다”며 제재에 몰린 이란이 핵 프로그램을 양보하고 제재 해제를 얻어낸 2015년 이란 핵합의(JCPOA)를 예로 들었다.
다가오는 11월 미국 중간선거 역시 트럼프 대통령 결정을 묶어둔 핵심 요인으로 꼽힌다. 선거를 앞둔 시점에 이란이 인질로 잡은 해협을 열기 위해 막대한 동결 자산을 풀어주고 제재를 유예하면 유권자들에게 유약한 지도자로 비칠 수 있다. 안드레아스 크리그 영국 킹스칼리지런던 부교수는 “트럼프 대통령이 단순히 해협 접근권을 되찾으려고 제재를 해제하는 모습처럼 보이기를 원치 않는다”고 했다. 이란이 온전한 정치적 항복을 선언하지 않는 이상, 미국이 나서 섣불리 합의문에 서명하는 모습이 중간선거에 정치적으로 더 위험하다고 판단한 것으로 해석된다.

일각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이 맹신하는 장기전 전략이 심각한 자충수로 돌아올 수 있다는 경고도 나온다. 시간이 흐를수록 급등하는 에너지 가격과 군사적 노출 확대가 중동 동맹국들과 미국 경제에 부메랑이 될 수 있다. 로이터·입소스가 지난 8월 말 벌인 조사에서 미국인 63%가 이란 전쟁에 반대해 찬성(31%)의 두 배를 넘었다. 치솟는 연료비와 생활비 문제는 공화당 중간선거 판세에 악재로 작용하는 추세다. 모하마드 엘마스리 도하 대학원 연구소 교수는 이란 압박뿐 아니라 트럼프 행정부 역시 심각한 압박에 직면해 있다고 지적했다.
한편 미국 거부에 직면한 이란은 결코 굴복하지 않겠다며 배수진을 쳤다. 아라그치 외무장관은 미 NBC에 “이란은 어떤 침략에도 단호히 맞설 것이며, 최후 심판일 전쟁이 일어난다 해도 이는 마찬가지”라고 강조했다. 마수드 페제시키안 이란 대통령 역시 지난주 뉴욕에서 열린 유엔 총회 연설에서 “제재와 해상 봉쇄가 유지되는 한 항행 자유를 허용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경제적 목적을 띤 핵 기술 개발 권리도 결코 포기하지 않겠다”고 덧붙였다.
네가르 모르타자비 미 국제정책센터(CIP) 선임연구원은 27일 알자지라에 “미국 정부가 경제적 고통과 정치적 굴복을 혼동하고 있을 수 있다”며 “이란 경제가 엄청난 압박을 받고 있지만, 그렇다고 이란 정부가 절대 받아 들일 수 없는 요구까지 용납하진 않는다”고 했다.
크리그 부교수는 “양측 모두 합의가 필요하지만 지금은 둘 다 기다릴수록 결국 얻을 합의가 나아진다고 믿는다”며 분쟁 장기화를 가장 유력한 시나리오로 꼽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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