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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정치 | 뉴권자 플레이 매뉴얼①] 3·1운동부터 응원봉 집회까지…민주주의 연대기

투데이신문

정치는 어렵고 선거는 복잡하다. 손안의 정보는 넘쳐나지만, 무엇이 진실인지 어떤 공약이 내 일상을 바꿀 실마리가 될지 가려내기란 결코 쉽지 않다.

[청년 정치 | 뉴권자 플레이 매뉴얼]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한다. 여기서 ‘뉴권자(New+유권자)’는 단순히 처음 투표권을 얻은 청년 세대만을 뜻하지 않는다. 정치에 관심은 있으나 갈 길을 잃었던 이들, 선거를 줄곧 타인의 이벤트로 여겨왔던 이들, 그리고 이제 막 자신의 삶과 정치의 연결고리를 감각하기 시작한 모든 ‘새로운 유권자’를 향한 초대장이다.

본 기획은 팬덤과 알고리즘, 마타도어가 뒤섞인 혼탁한 선거 환경 속에서 청년의 시각으로 정보를 해독할 수 있는 ‘현실형 선거 가이드’를 지향한다. 단순히 후보자의 이름과 나열된 공약을 전달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유권자에게 실제로 필요한 ‘판단의 무기’를 제공하고자 한다.

이 기획의 목적지는 투표 당일의 선택 그 너머에 있다. 한 표를 던지는 찰나의 순간이 아니라 그 투표가 투표함 밖에서 어떻게 우리의 삶으로 이어지는지를 탐색한다. ‘뉴권자 플레이 매뉴얼’은 청년 유권자들이 능동적인 정치 플레이어로 서기 위한 가장 확실한 공략집이 될 것이다.

기사의 이해를 돕기 위해 인공지능(AI)으로 생성한 이미지. [이미지 출처 =ChatGPT]
기사의 이해를 돕기 위해 인공지능(AI)으로 생성한 이미지. [이미지 출처 =ChatGPT]

【투데이신문 김재현·송수원 인턴기자】 대한민국 청년들은 오랫동안 ‘정치에 무관심한 세대’라는 평가를 받아왔다. 2022년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당시 2030세대의 투표율은 30%대 중반으로 50.9%인 평균 투표율보다 한참 낮은 수준에 머물렀다. 숫자만 놓고 보면 청년 세대는 정치와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집단처럼 보인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한국 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순간마다 가장 먼저 거리로 나섰던 세대 역시 청년이었다. 3·1운동의 학생들부터 4·19혁명, 부마항쟁, 광주민주화운동, 6월 민주항쟁, 촛불·응원봉 집회에 이르기까지 시대의 변화를 가장 먼저 감지하고 움직였던 이들 역시 청년이었다.

그렇다면 왜 청년들은 가장 먼저 움직였을까. 또 왜 지금은 정치와 투표를 망설이게 됐을까. [청년 정치 | 뉴권자 플레이 매뉴얼] 첫 번째 편은 바로 이 질문에서 출발한다. 민주주의의 역사를 이해하는 일은 결국 오늘의 정치 참여를 이해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흐름 속에서 청년들이 어떤 역할을 해왔는지, 그리고 왜 여전히 정치 참여와 투표가 중요한지를 따라가 본다.

1919년, 청년이 독립을 외치다 — 3·1운동

이화여자대학 학생들이 만세운동 행진을 하고 있다. [사진제공=한국학중앙연구원]
이화여자대학 학생들이 만세운동 행진을 하고 있다. [사진제공=한국학중앙연구원]

1919년 2월 8일, 도쿄의 조선인 유학생들이 먼저 움직였다. 이들은 조선청년독립단 명의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며 일제에 맞섰다. 훗날 ‘2·8 독립선언’으로 불리게 되는 이 사건은 국내 독립운동 세력에도 큰 영향을 미쳤고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아 3월 1일 서울 탑골공원에서 역사적인 독립선언문 낭독으로 이어졌다.

그 현장에도 학생들이 있었다. 보성전문학교·연희전문학교 학생들은 인쇄소 보성사에서 인쇄된 독립선언서를 전달받아 전국에 배포했고 시위 날짜와 장소를 조율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화학당·경성여고보 등의 여학생들도 거리로 나섰다.

만세운동은 빠르게 전국으로 번졌다. 3월 한 달 동안에만 수백 곳에서 시위가 일어났고 유관순처럼 고향으로 내려가 직접 만세운동을 이끈 학생들도 있었다. 청년들이 시작한 외침은 도시를 넘어 농촌까지 퍼져가며 전국적인 독립운동으로 확산됐다.

1960년, 학생이 독재를 무너뜨리다 — 4·19 혁명

1960년 4월 26일 제주도에서도 3.15부정선거에 항의하는 학생들의 거리 시위가 전개되었다.[사진제공=제주특별자치도]
1960년 4월 26일 제주도에서도 3.15부정선거에 항의하는 학생들의 거리 시위가 전개되었다.[사진제공=제주특별자치도]

1960년 3월 15일, 자유당 정권은 이승만의 4선을 위해 전국 곳곳에서 노골적인 부정선거를 자행했다. 투표함 바꿔치기와 완장부대 동원, 3인조·9인조 공개투표까지 동원됐다. 공식 발표된 득표율은 이승만 88.7%, 이기붕 79%였다. 그러나 실제 개표 과정에서는 일부 지역 득표율이 99%를 넘거나 유권자 수보다 많은 115%가 집계되는 등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결과가 이어졌다. 결국 이승만 정권조차 수치를 일부 수정해야 할 정도였다.

분노는 먼저 경남 마산에서 터져 나왔다. 그날 밤, 학생과 시민들이 거리로 나섰고 경찰의 발포로 사상자가 발생했다. 그리고 한 달 뒤인 4월 11일, 마산 앞바다에서는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숨진 마산상업고등학교 1학년 김주열의 시신이 발견됐다. 

4월 19일, 서울에서만 수만 명의 학생과 시민이 경무대(지금의 청와대)를 향해 행진했다. 경찰은 시위대를 향해 실탄을 발포했고 그날 하루에만 서울에서 100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학생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4월 25일에는 전국 대학교수 258명이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는 현수막을 들고 거리로 나왔다. 결국 다음 날인 4월 26일, 이승만은 하야를 선언했다. 청년으로부터 시작된 민중의 힘이 정권을 바꾼 순간이었다.

1979년, 침묵을 깨고 터진 저항 — 부마항쟁

부산일보 사진기자 출신 정광삼 한국사진작가협회 부산광역시지회 자문위원이 최근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에 기증한 40년 전 부마민주항쟁 당시 광복동 시위 행렬 사진. [사진=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제공]
부산일보 사진기자 출신 정광삼 한국사진작가협회 부산광역시지회 자문위원이 최근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에 기증한 40년 전 부마민주항쟁 당시 광복동 시위 행렬 사진. [사진=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제공]
 

1972년 유신헌법이 선포된 이후 한국 사회는 긴 침묵 속으로 들어갔다. 긴급조치는 유신 체제에 대한 비판 자체를 범죄로 규정했고, 경찰과 정보기관은 대학 캠퍼스를 상시 감시했다. 교수와 학생은 말을 골라 해야만 했고, 신문은 검열 아래 놓였다. 저항의 공간이 사실상 사라진 시대였다.

그 침묵이 깨진 것은 1979년 10월 부산에서였다. 10월 16일 부산대학교 학생들이 교내 시위를 시작했고, 이튿날에는 시내로 진출해 도심을 가득 메웠다. “독재 타도”, “유신 철폐”를 외치는 목소리가 부산 전역에 울려 퍼졌다. 시위는 곧 마산으로 번졌고 학생들과 시민들이 잇따라 합류했다. 일부 지역에서는 경찰서와 방송국이 공격받을 만큼 분위기가 격화됐다. 결국 박정희 정권은 계엄령과 위수령을 선포하며 군대를 투입했다.

그로부터 열흘 뒤인 10월 26일, 박정희는 측근 김재규의 총에 사망했다. 18년 독재의 끝이었다. 이 또한 자유를 향한 청년들의 움직임이 전 세대로 번져 나가 시대의 변화를 이끌어낸 결과라 할 수 있다.

 1980년, 가장 어두운 봄에서 — 광주민주화운동

1980년 5월 광주 계엄군과 대치 중인 시민들[사진제공=뉴시스]
1980년 5월 광주 계엄군과 대치 중인 시민들[사진제공=뉴시스]

유신 체제가 무너지자 많은 시민들은 민주화의 시대가 열릴 것이라 기대했다. 이른바 ‘서울의 봄’이었다. 1980년 봄 대학가는 다시 활기를 되찾았고 학생회도 부활했다. 그러나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는 5월 17일 자정을 기해 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했다. 김대중 등 야권 인사들이 체포됐고 대학에는 군인들이 투입됐다.

다음 날 전남대학교 학생들이 학교 정문 앞에 모였다. 계엄군은 학생들을 향해 곤봉을 휘두르며 무차별 진압에 나섰다. 이 소식이 광주 시내로 퍼지자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이전부터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에 참여해온 청년들이 항쟁의 중심에 섰다. 시위대는 무장 시민군으로 발전했고 전남도청 일대를 거점으로 열흘간 항쟁을 이어갔다.

광주의 항쟁은 열흘 만에 계엄군에 의해 진압됐다. 그러나 당시 신군부의 언론 통제로 광주의 실상은 외부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그 침묵을 깨려 한 청년이 있었다. 서강대학교 무역학과 4학년에 재학 중이던 김의기는 1980년 5월 30일 서울 기독교회관 6층에서 ‘동포에게 드리는 글(표제 : 동포여, 지금 무얼하고 있는가)’이라는 유인물을 뿌리며 계엄군의 유혈 진압 실태를 폭로하고 스스로 몸을 던졌다. 광주의 비극이 봉인되던 시절, 누군가는 반드시 알려야 한다는 절박함으로 행동에 나선 것이다.

광주의 기억은 김의기처럼 목숨을 걸고 진실을 알리려 했던 청년들의 실천을 통해 끝내 세상 밖으로 드러났다. 그렇게 남겨진 기억은 사라지지 않았고 이후 더 큰 민주화운동과 저항의 씨앗이 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1987년, 가장 뜨거웠던 여름 — 6월 민주항쟁

최루탄에 맞아 쓰러진 이한열 열사[사진제공=뉴시스]
최루탄에 맞아 쓰러진 이한열 열사[사진제공=뉴시스]

1987년 1월 14일 새벽,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3학년 박종철이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숨졌다. 경찰은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쓰러졌다”는 발표를 내놨지만 진실은 달랐다. 박종철은 수사 과정에서 가해진 물고문 끝에 목숨을 잃었다.

사건은 은폐되려 했지만 법의학자와 언론의 추적을 통해 고문 사실이 드러났다. 이후 정권의 조직적인 은폐 시도가 추가로 폭로되면서 시민들의 분노는 더욱 커졌다. 여기에 전두환 정권은 4월 13일 대통령 직선제 개헌 논의를 거부하는 ‘4·13 호헌 조치’를 발표했다.

그러던 중 박종철군 고문살인 조작·은폐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를 하루 앞둔 6월 9일 연세대학교 앞에서 시위에 참가하던 경영학과 2학년 이한열이 경찰이 쏜 최루탄에 머리를 맞고 쓰러졌다. 박종철의 죽음에 이어 또 다른 청년이 거리에서 쓰러진 것이다. 이 사건은 결국 6월 민주항쟁이 전국적으로 폭발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6월 10일, 전국 22개 도시에서 동시다발 시위가 벌어졌다. 학생들은 조직망을 통해 시위를 설계하고 실행했다. “호헌 철폐”, “독재 타도”를 외치는 함성이 전국을 뒤덮었다. 청년들이 먼저 거리로 나서자 그동안 침묵하던 시민들도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6월 26일 국민평화대행진에는 전국에서 100만 명 이상이 참여했고, 약 20일 동안 연인원 500만 명이 시위에 나섰다. 결국 6월 29일 당시 노태우 민주정의당 대표는 대통령 직선제 개헌 수용을 선언했다. 같은 해 10월 직선제 개헌이 이뤄졌고, 12월에는 대통령 직선제 선거가 실시됐다. 또 한 번 청년과 시민들이 만들어낸 거리의 힘이 한국 민주주의의 방향을 바꾼 순간이었다.

꺼지지 않는 불씨 — 촛불과 응원봉

윤석열 대통령 탄핵 시위 당시 응원봉을 들고 모인 시민들[사진제공=뉴시스]
윤석열 대통령 탄핵 시위 당시 응원봉을 들고 모인 시민들[사진제공=뉴시스]

민주주의를 향한 청년들의 움직임은 형태만 달라졌을 뿐 멈추지 않았다. 2000년대 이후 이어진 촛불집회 역시 청년 세대가 중심에서 움직여온 흐름이었다. 즉 촛불집회의 역사는 지금의 청년세대가 정치적 주체로 성장해온 과정과도 맞닿아 있다. 

촛불집회의 초기 형태는 2002년 미선·효순 추모 집회에서 처음 드러났다. 온라인 게시판에 올라온 제안으로 시작된 이 집회는 인터넷 공간이 정치 참여의 새로운 장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이어 2004년에는 야당의 일방적인 탄핵안 가결에 반발해 대규모 대통령 탄핵 반대 촛불집회가 벌어졌다.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는 청년세대의 역할이 본격적으로 부각됐다.. 당시 10대 중·고등학생들, 특히 여학생들이 적극적으로 거리로 나왔고 “미친 소”, “미친 교육” 같은 구호를 통해 미래에 대한 불안과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을 드러냈다. 이 시기를 거치며 청년 세대는 사회 문제를 직접 제기하는 정치적 주체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2016~2017년 국정농단 탄핵 촛불집회는 이러한 흐름의 정점이었다. 연인원 1600만여 명이 참여한 이 집회에서 2030세대는 전체 참여자의 약 45%를 차지하며 핵심 동력으로 작용했다. 특히 10대 시절 2008년 촛불집회를 경험했던 세대는 성인이 된 이후에도 세월호 참사와 사회적 재난 등을 겪으며 국가 시스템과 민주주의에 대한 문제의식을 이어갔다. 사회적 약자와 연대하고 자신의 목소리를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시민 문화 역시 이 과정 속에서 함께 성장했다.

그리고 촛불은 어느새 응원봉으로 이어졌다. 2024년 12월 3일 윤석열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하자 국회는 약 6시간 만에 계엄 해제 결의안을 통과시켰고 이후 전국 곳곳에서는 탄핵 촉구 집회가 이어졌다. 과거 촛불과 구호가 중심이었다면 이번 광장에는 K-팝 아이돌 응원봉과 LED 야광봉이 등장해 새로운 형태의 ‘K-시위’ 문화라는 평가를 받았다.

청년들이 든 형형색색의 불빛은 집회 현장을 채웠고 이는 시민들이 보다 부담 없이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상징적 장치로 작용했다. 풍자와 유머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탄핵이 답이다’ 같은 풍자 캐럴이 등장했고, ‘전국 집에 누워있기 연합’, ‘강아지발냄새연구회’ 같은 재치 있는 깃발 문화도 이어졌다. 해학과 밈(Meme)을 활용한 새로운 집회 문화는 시민들의 공감과 참여 장벽을 낮추며 광장을 보다 일상적이고 열린 공간으로 변화시켰다.

2024년 12월 14일 국회에서 탄핵소추안이 가결됐고, 2025년 4월 헌법재판소의 탄핵 인용으로 윤석열 대통령은 파면됐다. 촛불은 응원봉으로, 대자보는 SNS와 밈으로 바뀌었지만 민주주의의 위기 앞에서 가장 먼저 움직인 세대 가운데에는 또다시 청년들이 있었다.

뉴권자 리뷰 | “민주주의는 여전히 우리의 삶과 연결돼 있었다”

기사의 이해를 돕기 위해 인공지능(AI)으로 생성한 이미지. [이미지 출처 =ChatGPT]
기사의 이해를 돕기 위해 인공지능(AI)으로 생성한 이미지. [이미지 출처 =ChatGPT]

실제 응원봉을 들고 광장에 모인 청년들은 민주주의와 정치 참여를 자신의 일상과 미래를 결정하는 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12·3 비상계엄 선포 직후 사안의 심각성을 체감해 시위에 참여한 서강대학교 총학생회장 출신 김석현(24)씨는 “국회의 기능이 무력화되고 국민의 기본권이 제한되는 상황을 확인한 뒤 헌법적 질서가 흔들리는 위기를 개인으로서도, 학생 공동체의 대표로서도 외면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며 “학생회 동료들과 긴급 논의를 거쳐 광장으로 나섰다”고 말했다.

김씨는 정치적 무관심은 결코 중립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그는 “시민의 무관심은 결국 소수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며 “광장에서의 행동이 여론을 만드는 과정이라면 투표는 그 여론을 실제 제도와 권한으로 옮기는 과정”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청년들이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면 청년의 삶과 의제는 우선순위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또 청년세대의 강점으로는 ‘선명함’을 꼽았다. 그는 “청년들은 기존 시스템과의 이해관계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롭기 때문에 정치적 타협보다 민주주의 원칙과 법치 같은 본질적 가치에 더 집중할 수 있다”며 “특히 청년 특유의 기동성과 연대 역량 역시 급박한 상황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김채연(25·가명·여)씨는 이전부터 집회와 사회운동에 꾸준히 참여해왔던 경험을 바탕으로 이번 탄핵 시위 역시 자연스럽게 참여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번 시위를 통해 서로 다른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끼리도 충분히 연대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확인했다”며 “탄핵 이후에도 이런 연대가 계속 이어지길 바랐지만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는 점 역시 느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그럼에도 이런 경험들이 결국 사회를 조금씩 변화시킬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있다”고 덧붙였다.

김씨는 흔히 말하는 ‘청년 정치 무관심’이라는 표현 자체에도 의문을 드러냈다. 그는 “노동·주거·젠더·안전처럼 청년들의 삶 속에서 벌어지는 모든 선택과 갈등 해결 과정은 이미 정치와 연결돼 있다”며 “청년들이 정치에 관심이 없는 것이 아니라 정치 참여 방식을 너무 좁게 상상하고 있는 것에 가깝다”고 말했다. 이어 “단순히 무관심을 지적하기보다 무엇이 청년들과 사회의 상상력을 제한하고 있는지 질문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해린(26·가명·여)씨는 이번 시위를 통해 이전보다 더 많은 청년들이 거리로 나와 자신의 목소리를 직접 내기 시작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촛불 대신 응원봉과 다양한 깃발이 등장하면서 집회 분위기가 훨씬 가볍고 참여하기 쉬운 방향으로 바뀌었다”며 “그동안 광장에 거리감을 느꼈던 시민들도 보다 편하게 자신의 의견을 표현할 수 있게 된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정치에는 자신의 의견만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줄 아는 사람이 필요하다”며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를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 자신 역시 실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이 정치에 더 많이 참여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Final Manual | 민주주의 플레이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청년은 언제나 한국 민주주의의 변화를 앞당겨 온 주체였다. 거리에서, 학교에서, 광장에서 먼저 질문을 던지고 침묵을 깨며 시대의 균열을 드러낸 이들도 결국 청년들이었다. 그들의 목소리는 단지 젊은 세대의 의견에 그치지 않는다. 사회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민주주의가 어떤 방향으로 유지되어야 하는지를 보여 주는 중요한 신호이기도 하다.

오제연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는 시대별 민주화운동에서 청년층이 중심에 설 수 있었던 이유로 “가장 먼저 거리로 나서 문제를 제기하고, 가장 큰 규모로, 가장 뜨거운 열정으로 저항한다”는 점을 꼽았다. 실제로 한국 현대사에서 청년들은 국가가 위기의 순간마다 가장 앞에서, 뜨겁게 움직여왔다.

다만 오 교수는 오늘날 청년 정치 참여를 단순히 ‘무관심’으로 해석하는 시각에는 선을 그었다. 그는 “과거 엘리트 대학생 중심 시대와 현재를 단순 비교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며 “오늘날 대학생은 더 이상 특권적 엘리트 집단이 아니고 온라인 공간 역시 새로운 정치 참여의 장으로 기능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동시에 최근 청년층 내부에서 나타나는 혐오 정치와 극단주의 확산에 대한 우려도 언급했다. 오 교수는 “과거처럼 민주 대 반민주의 단순 구도가 아니라 혐오와 극단주의가 뒤섞인 복합적인 상황”이라며 “청년층 내부의 다양성과 분화를 더 세밀하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현재 청년 정치 참여가 과거보다 약해 보이는 현상에 대해서는 “성숙하고 안정된 사회일수록 청년층의 역할이 상대적으로 줄어드는 것은 자연스러운 측면도 있다”고 분석했다. 다만 “청년들의 정치 참여를 보장할 제도적 장치와 기성세대의 지원 역시 필요하다”며 “결국 청년 문제는 청년들이 직접 참여할 때 가장 현실적으로 해결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민주주의는 누군가 대신 지켜주는 시스템이 아니다. 변화는 기다리는 사람보다 질문하고 참여하는 사람들에 의해 움직여왔다. 청년들이 자신의 삶을 둘러싼 문제에 목소리를 내고 행동으로 참여할 때 민주주의 역시 더 오래 버티고 더 멀리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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