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아랍 국가들과 100억달러(약 13조5000억원) 규모의 공동 투자기금을 조성해 호르무즈 해협을 우회하는 새로운 에너지 수송망을 구축하는 방안을 추진한다. 이란과의 전쟁으로 호르무즈 해협 통항이 사실상 마비되면서 국제유가와 가스 가격이 오른 가운데, 새로운 송유관 등을 건설해 중동의 에너지 수출이 하나의 해상 길목에 좌우되는 구조를 바꾸겠다는 구상이다.

22일(현지 시각)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미국은 아랍 국가들과 ‘동맹·건설·신뢰를 위한 파트너십(Partnership for Allied Construction & Trust·Pact)’이라는 공동 투자기금 설립을 논의하고 있다.
FT가 입수한 발표자료 초안에 따르면 미국이 50억달러(약 6조7000억원)를 출자하고 중동 국가들이 새 지주회사를 통해 비슷한 규모의 자금을 부담하는 방식이다. 미국이 Pact 이사회를 이끌고, 미국과 아랍 국가 간 구체적인 협상은 오는 10월 시작하는 방안이 제시됐다. 투자금은 이란과의 전쟁으로 파괴된 에너지·기타 기반 시설을 복구하는 동시에 호르무즈 해협을 거치지 않고 원유 등을 수출할 수 있는 새로운 송유관과 관련 시설을 건설하는 데 쓰일 예정이다.
미국이 궁극적으로 노리는 건 이란의 ‘호르무즈 카드’ 약화다. 전쟁 이전 전 세계 석유와 가스의 약 5분의 1이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했다. 이란은 지난 2월 미국·이스라엘의 대(對)이란 전쟁이 시작된 이후 호르무즈 해협의 선박 통행을 극도로 제한하면서 세계 에너지 공급에 차질을 빚는 방식으로 트럼프 행정부를 압박해 왔다.
Pact는 초기 100억달러를 넘어 대규모 에너지·인프라 투자 플랫폼으로 확대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FT가 확인한 자료에는 Pact를 중동 동맹국의 전략적 에너지·인프라 자산에 투자하는 ’500억달러 이상 규모의 투자 플랫폼’으로 키우는 구상이 담겼다. 국부펀드와 민간 투자회사의 자금도 추가로 끌어들인다는 계획이다.
특히 블랙스톤과 블랙록의 글로벌인프라스트럭처파트너스(GIP), KKR 등이 해당 자료의 투자자 예시로 거론됐다. 다만 이들의 참여가 확정된 건 아닌 것으로 전해졌다. FT는 일부 투자회사가 트럼프 행정부가 자신들의 이름을 초안에 포함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당황했다고 전했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UAE) 등 걸프 국가들은 이미 호르무즈 해협을 거치지 않는 원유 수송망을 갖추거나 신규 송유관을 계획하고 있다. 문제는 육상 우회로도 공격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점이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이달 동서(East-West) 송유관이 이라크에서 발사된 드론 공격으로 펌프장 3곳이 파손되자 가동을 중단했다. 이 송유관은 호르무즈 해협을 거치지 않고, 사우디아라비아 원유를 홍해로 수송할 수 있는 핵심 우회로다. 이후 복구 작업을 거쳐 22일(현지 시각) 송유관 가동을 일부 재개했지만 완전 정상화까지는 최대 6~8주가 걸릴 것으로 전망된다.
이에 미국은 하나의 우회로에 의존하기보다 여러 수송 경로를 확보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특정 길목이 막혀도 에너지 수출을 이어갈 수 있는 구조를 구축하려는 행보로 읽힌다. Pact의 목표는 하나의 길목이 역내 에너지 흐름 전체를 멈추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수송로가 많아질수록 적대 세력이 세계 에너지 체계에 행사할 수 있는 영향력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다만 실제 투자가 계획대로 이뤄질지는 미지수다. 마이클 와히드 한나 국제위기그룹(ICG) 프로그램 디렉터는 “(Pact가) 사업성이 있다면, 아랍 국가들이 미국과 함께 투자할 가능성이 있다”면서도 “이들이 트럼프 대통령을 위해 경제성이 떨어지는 사업에 참여하진 않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백악관은 이와 관련된 FT의 질의에 답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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